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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즘의 성격과 전략

category | | author Thursday November 27, 2014 04:50author by Daniel Cohn-Bendit Report this post to the editors

Translation of [Nature and Strategy of Bolshevism]

볼세비키 정권의 반혁명적 성격과 그 결과를 러시아혁명의 상황에서 서술

볼세비키당의 전략과 성격

저자: 다니엘 콩-방디(Daniel Cohn-Bendit) (역자 주: 1945년 프랑스 몽또방에서 출생한 저자는 1968년 5월 프랑스 혁명의 주요 인물이었다. 프랑스 공산당이 장악한 노동조합이 학생/노동자 혁명을 저지한 직후 이 글을 썼다. 그는 독일녹색당 창당 주역이었으며 현재 유럽의회 의원으로 유럽연방을 주창하면서 아나키즘에서 이탈했다.)

1. 러시아혁명 과정에서 드러난 볼세비키당의 정체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는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혁명 내내 볼세비키당이 대중의 꽁무니를 질질 따라가고 있었던 점을 정직하게 묘사하면서도 당이 혁명의 성공에 필요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직한 역사서술자 트로츠키가 볼세비키당 이론가 트로츠키와 충돌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병사들은 공장위원회에 뒤쳐졌다. 공장위원회는 노동자 대중에게 뒤쳐졌다….혁명에서는 뒤쳐질 수 없는 볼세비키당 역시 대중 투쟁의 파도 속에서 떠 다녔다…. 인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정당이라는 이 당은 혁명의 전개에 당혹해 할 뿐이었다. 혁명의 불길 속에 당을 다시 단련시키고 밀려 닥치는 혁명의 파도 속에서 당 대오를 정비해야 했다. 혁명의 결정적 국면에서 대중은 당보다 100배나 과격했다.” ([러시아 혁명사] 제 1권)

노동자 전위당이라는 볼세비키당의 신화는 위 인용문 만으로도 그 허구를 드러내고 있다. 1917년 2월 혁명이 터지자 이 “뒤쳐짐”은 그 첫 모습을 확연히 드러냈다. 러시아제국 황제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노동자 평의회를 출현시킨 업적은 오로지 혁명 대중 자신의 것이었다. 이 점과 관련해 트로츠키는 사회혁명당 좌파 지도자였다가 곧바로 볼세비키당으로 넘어간 므스티슬라브스키를 인용하고 있다: “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처녀들처럼 당원들은 졸고 있다가 혁명을 맞이했다.” (같은 책)

이것은 당시 모든 좌익 조직들과 볼세비키당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얘기였다: “혁명의 마지막 순간에도 이 지도자들은 무장봉기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어떤 지침도 내릴 수 없었다.” (같은 책) 간단히 말해 2월 혁명이나 그 이후에나 볼세비키들은 혁명 대중을 지도하기는커녕 이들의 혁명적 주도성과 기세에 내내 끌려 다녔다. 7월이 되자 약 만 명이 모인 집회에서 기관총 부대원들은 군중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7월 4일 전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독일군 전선에 가서 독일노동자들과 싸우는 대신 우리는 임시정부의 부르주아 장관들에게 기관총 세례를 퍼붓기로 결의했다.” 그러자 열이 오른 노동자들이 외쳤다: “그래 그 놈들을 해치우자.” 이때 당의 지시를 받아 행동에 나서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볼세비키 당원인 공장위원회 서기가 제안했다. 그러자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이런 빌어먹을. 또 미루자고? 더 이상 안돼.” 오후 6시 볼세비키당 집행위원회 대표들이 도착했으나 이들은 더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같은 책 제 2권)

이 혁명 과정에서 볼세비키들은 한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투쟁 자체를 억누르려 했다. 이들은 모든 문제를 당 본부로 보냈고 지도자들이 투쟁 현장에 도착하면 대중은 이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반대했다. 처음부터 자체 동력으로 움직이고 있던 대중은 스스로 병사 노동자 평의회를 수립했고 이를 통해 볼세비키당보다 엄청나게 앞서갔다. 투쟁의 실질적인 결정은 평의회에서만 결정되었다. 노동자 평의회에서 노동자 각자는 발언권이 있었고 이를 통해 투쟁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처음에 멘세비키가 그리고 다음에는 볼세비키가 당원 대의원들을 평의회 회의장에 보냈지만 어떤 정치조직도 평의회 결정 과정에서는 배제되었다. 그리고 대의원은 정치노선이 아니라 투쟁 참여도에 따라 선출되었다. 따라서 평의회 민주주의가 작동될 때는 당원 출신 대의원들이 투쟁을 제지하려 들 경우 즉시 거부당했다. 1917년 7월 투쟁에서 볼세비키당의 역할을 트로츠키는 이렇게 묘사했다: “볼세비키들은 투쟁의 물결에 휩쓸려 떠밀리다가 당의 공식 결정에 위배되는 행위에 대한 핑계거리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같은 책) 결국 체면을 세우기 위해 볼세비키 당원들은 당 지도부에 정면 도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 중앙위원회는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호소했다: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무장하여 거리로 나서라고 여러분들을 부추기는데 이것은 평의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당들의 방침이 아니란 것을 입증한다….’ 이렇게 당과 평의회의 중앙위원회는 제안을 했지만 행동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대중이었다.” (같은 책)

여기에서 볼세비키당이 대중의 투쟁을 반대하는 이유가 타당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당의 의사가 대중에게 전혀 먹혀 들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혁명 시작 후 5개월, 10월 봉기 전 3개월의 시점에 대중은 자체 동력과 결정으로 투쟁하고 있었으며 당은 이 상황에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다: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던 볼세비키 당원인 네프스키, 라세비치, 파드보이스키 등은 발코니의 연설을 통해 연대 소속 병사들에게 막사로 돌아갈 것을 호소했다. 그러자 이들의 연설을 듣던 병사들이 외쳤다: ‘지옥으로 꺼져라.’ 병사들이 이렇게 외친 적은 전에 한번도 없었다. 이것은 당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대책은 무엇이었나? 대중의 투쟁을 당이 수수방관해야 하는가? 뻬쩨르부르그 시당 위원, 당협의회 대의원, 연대와 공장의 대표 등은 공동으로 결의문을 채택했다: ‘투쟁을 저지하려는 소용없는 시도를 중지할 것. 임시정부의 위기가 인민을 위한 쪽으로 해결되도록 투쟁을 유도할 것.” (같은 책) 노동자 전위당의 신화는 모든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유지되어야 했다!

트로츠키 자신은 이렇게 토를 달았다: “투쟁 현장의 당 중앙위원들은 이 전술 전환을 승인했다.” (같은 책) 마치 당이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비밀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대중을 억압할 수 있었던 1921년이 되어서야 당은 선택의 여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좀 뒤의 일이었고 1917년 7월 시기에 당은 팔짱을 낀 채 그저 쳐다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당 지도부를 대신해 카메네프는 이렇게 말했다: “당과는 관계없이 대중이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거리에서 투쟁하는 이들과 우리도 같이해야 한다. 대중의 투쟁에 정돈된 모습을 부여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할 일이다.” (같은 책) 당은 지도는 커녕 투쟁을 그저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시인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시위 중지를 명령한 당 중앙위원회의 그날 오후 지침이 당 신문에서 삭제되어야 했다. 그러나 삭제된 칸에 다른 내용을 채워 넣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결국 프라우다 지는 빈 칸을 그대로 두고 인쇄 배포되었다. 그리고 시위에는 최소 50만 명이 참여했다. 트로츠키는 당연히 이렇게 결론지었다: “당의 의지와는 반대로, 당의 존재와는 무관하게 대중은 투쟁을 이끌었다. 대중의 정서를 당이 조장한다고 우리를 비난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중의 정서를 표현하려고 우리는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같은 책)

결국 위대한 전위당은 투쟁 대변인으로 전락했으며 이 역할마저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2월에는 졸고 있었고 7월에는 대중에게 질질 끌려 다녔지만 10월 혁명은 당이 수행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4월부터 10월까지 레닌은 고군분투하여 당 지도부가 대중과 함께 하도록 했을 뿐이다: “뻬쩨르부르그 봉기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당 우파의 수수방관 노선과 대중 투쟁에 대한 저항은 결코 분쇄되지 못했다. 이후 지도자들의 동요로 인해 모스크바 봉기는 거의 실패할 뻔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에서 피아타코프의 당 위원회가 방어 일변도 전술을 구사하면서 장기적으로 우크라이나 의회에 투쟁의 주도권과 권력을 넘겨주었다…. 보로네즈의 승리는 당 위원회의 활동적인 소수파에 의해 가능했다. 대부분의 지방 도시에서 볼세비키들은 10월에 “반혁명에 대항하는” 타협주의 세력들과 동맹했다. 최근 몇 년간 이 사실들을 은폐하려는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신문, 회고록, 역사 전문잡지 등은 이 사실들을 수도 없이 증언하고 있다. 결국 가장 혁명적이라던 정당조차 10월 봉기 직전 이 투쟁에 크게 저항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같은 책 제 3권)

10월 초 레닌은 당 중앙위원회를 우회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밖에 없었다: “봉기와 관련하여 그가 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는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당위원회 뿐 아니라 지구 위원회의 믿을만한 노동자들에게도 보내졌다. 봉기를 지지하는 확고한 입장을 택하도록 레닌은 뻬쩨르부르그 당 협의회에 호소했다. 이 호소에 응해 당 협의회는 당 중앙위원회가 노동자, 병사, 농민의 불가피한 봉기를 지도하기 위한 확고한 조치들을 취할 것을 끈질기게 촉구했다. 영광스러운 전위당이 또다시 대중의 꽁무니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레닌은 당의 선지자적인 역할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쓰면서 결국 자신이 기초했던 민주집중제 원칙마저 던져버려야 했다: “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의 상층부가 동요하고 있다. 권력 장악에 대한 두려움, 투쟁을 결의문, 항의, 회의에서의 토론으로 대체하려는 경향 등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말한다: “이것은 당 하부를 중앙위원회에 직접 대항시키려는 시도이다. 이 조치를 레닌은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혁명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다른 고려사항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같은 책)

간단히 말하면 당의 상층부는 2월부터 10월까지 전위당 이론과는 달리 혁명 지도부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혁명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당 지도부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당의 존재나 지도력과는 무관하게 대중이 혁명을 전진시켰다. 역사서술자 트로츠키에게 이 점만은 명백했다. 그러나 당 이론가인 그는 이 올바른 결론을 무시하고 이렇게 주장했다: 지도자 없이 대중이 혁명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월 혁명은 노동자 그리고 병사 제복을 입은 농민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투간-바라노프스키는 말했다. 트로츠키는 이 발언이 처음에는 옳다고 인정했다: “누가 혁명을 지도했으며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나서게 했는가? 이 큰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 문제는 보편적인 대답으로 가장 단순하게 해결되었다. 즉 혁명을 지도한 세력은 없고 혁명은 저절로 일어난 것이다.” (같은 책 제 1권)

트로츠키는 올바른 질문을 던졌을 뿐 아니라 명확한 대답까지 내놓았다: 이론이나 실제에서 혁명은 대중의 의지가 자발적으로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당 이론가인 그는 이 명백한 결론을 인정할 수 없었다. 당 중앙의 지도력이 그의 핵심 도그마였기에 그는 이것을 어떤 대가를 치르면서도 지켜내야 했고 따라서 정직한 역사서술자로서의 올바른 결론을 부정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자바드스키의 명제를 올바르다고 보고 이를 인용했다: “자연과학 분야보다 특히 사회학 분야에서 자발성 이론은 맞지 않는다. 이름 있는 혁명 지도자 누구도 혁명 운동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름을 새겨 넣지 않았을 뿐이지 이들 지도자들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책)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익명성이야말로 자발적 투쟁의 특징이다. 대중의 자발적 투쟁은 이름있는 조직의 지도를 경멸하며 이 조직의 간판을 거부한다. 트로츠키는 이에 반박한다: 지도자가 없는 혁명은 있을 수 없다; 지도자의 이름을 딱 잡아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지도자의 이름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2월 혁명 바로 뒤에 조직된 [2월 27일 장교연합]은 설문지를 돌려 누가 볼린스키 연대를 병영 바깥으로 인도하여 혁명 대열에 동참하게 했는지를 알아내려 했다. 이 사실을 상기시키며 트로츠키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설문지를 통해 주동자 7명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병사들도 이 주동자들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크다.” (같은 책) 병사들이 주동자들의 일부가 아니라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을 그는 왜 인정하지 않을까? 그가 원하는 설명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 거사의 일등 공신이 거리에서 싸우다 사망하여 이름을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결국 역사서술자인 트로츠키는 역사상의 증거를 조작하여 신비한 지도자를 등장시킨다. 그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의 황당한 주장을 부각시키는 인용문이 또 있다: “2월 24일 금요일에 당 상층부의 어느 누구도 혁명을 예상하지 못했다…원로원 의원 한 명이 동승한 전차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서 유리창이 심한 소리를 내더니 하나가 깨졌다…. 전차 운전수는 ‘더 이상 가지 않을 것이니’ 모두 내리라고 했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온 모든 전차들이 멈췄다…. 자유주의 관료들은 이 결연한 전차 운전수의 ‘험상궂은 표정’을 알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전쟁 중에 있는 러시아 제국의 수도에서 관료들이 타고 있던 전차를 멈추었다. 그는 혼자서 누구의 지지도 받지 않고 이렇게 행동했다. 혁명에 대한 고귀한 의무감이 틀림 없이 그를 움직였을 것이다. 러시아 제국의 전차를 멈춘 전차 운전수들은 모두 그와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똑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이 전차는 더 이상 운행하지 않는다! 리테이니 대로의 전차 운전수는 역사를 바꾸는 의식적 요소였다. 누군가 그를 혁명 의식으로 미리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공장과 거리의 이 이름 없는 결연한 정치인들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지도자에 의해 혁명 의식으로 무장되어야 했다.” (같은 책)

볼세비키당은 혁명의 이 결정적 순간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식의 도구’인 이 살아있는 혁명 주역들은 혁명의식으로 무장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당이 아니라면 누가 이들을 무장시킬 수 있었겠는가? 과거에 당은 대중을 혁명의식으로 무장시키는 활동을 했으므로 지금 혁명의 순간에는 팔짱을 끼고 조용히 있어도 된다. 이것이 트로츠키의 결론이다. 그에게는 두 가지 대안 밖에 없다: 혁명 대중이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당에 의해 의식화가 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질 수는 없으니 당연히 당의 지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유태인은 자기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야, 두 가지 대안 밖에 없으면 세 번째 대안을 택해라.” 일상 생활에서 노동자들은 당의 지도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으니 혁명도 당 없이 스스로 이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대안이다. 이 점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한다: “힘은 없으면서 허풍만 많은 지식인들은 대중을 가르치려는 욕망에 불타 올랐다…. 그러나 이들을 이해하거나 이들로부터 배울 능력은 전혀 없었다. 이런 능력이 없으면 혁명 정치는 존재할 수 없다.” 그의 생각은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노동자들을 군대처럼 통제하고 크론슈타트의 수병과 노동자들을 총살한 장본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이 자기 머리를 깍지 못하듯 트로츠키는 자신의 무능력을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그가 저술한 러시아 혁명사는 참으로 값진 보물이다. 자신의 정치적 결론들을 반박하는 역사적 사실들을 풍성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정직한 인간인가 아니면 멍청한 인간인가? 당의 지도력에 대해 강변했던 앞장의 내용을 까먹은 채 그는 뒷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느 공장은 ‘삶에 대한 권리가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보다 더 위에 있다’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이 구호는 당에서 지시하지 않았다.” (같은 책)

그는 주장한다: “노동자들의 사고는 좀더 과학적이 되었다….크게 보면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에 의해 비옥해졌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도전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학적 사고’라는 용어는 의심스럽지만 멘세비키와 볼세비키의 교육에 과학적 마르크스주의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아나키즘적 노동조합주의, 아나키즘적 혁명주의, 사회혁명주의 등 다른 조류들도 기여를 했다고 덧붙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사상을 논의하면서 트로츠키 자신도 인정하듯이 이 사상의 발전은 주요하게는 ‘대중의 생생한 체험”에 의한 것이다.

1905년 혁명 과정에서 노동자 평의회가 수립된 주 요인은 바로 이 생생한 체험이었다. 당시 볼세비키당은 평의회를 대체로 무시했고 트로츠키는 이 점에 대해 당을 거세게 비판했다. 그러나 자신이 볼세비키 이론가로 돌변하자 노동자의 자발성이라는 사고 자체를 폄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제 2권에서 ‘볼세비키당 마저 우리의 투쟁에 대해 어물쩍거리면서 우리를 저지했다’고 노동자들이 비난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 저서의 좀 뒤에 가면 이렇게 말한다: “볼세비키당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의 스파르타쿠스단은 혁명에서 패배했다.”

이런 황당한 논리는 그가 노동자의 자발성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논리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전쟁 기간 내내 그리고 혁명의 시작 시점에 존재했던 당의 활동에 대한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하면 이 시기에 당 상층부가 지적으로 엄청나게 퇴보했다는 진실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사실 이때 당 활동은 거의 정지상태에 있었다. 이 퇴보의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대중투쟁으로부터 고립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외국 지도부 즉 주로 레닌으로부터 고립되었다는 사실이다.” (같은 책 제 3권) 이렇게 퇴보를 이유를 드는 것은 볼세비키당의 존재 의의에 대한 도전이다. 레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통해 트로츠키는 당의 존재 의의를 깎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이 주장에서 레닌을 결점이 없는 혁명지도자로 추켜 세우고 있다. 이것도 전혀 사실과 다르다. 1917년 2월과 10월 사이에 레닌은 과거 자신의 입장들에서 상당히 후퇴했다. 1905년 레닌은 노동자 평의회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다. 그런데 1917년 1월에는 스위스 노동자들 앞에서 강연을 하면서 노동자 평의회를 지나가는 투로 언급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몇 달 뒤 그는 이 입장을 다시 바꾸면서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구호를 제창하여 볼세비키당의 대다수를 실망시켰다. 비록 규율도 있고 레닌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지만 당은 레닌과 같은 속도로 이렇게 노선을 돌변시킬 능력은 없었다. 이 급속한 노선 전환은 레닌의 천재성을 증명했지만 한편으로는 볼세비키 유형의 당이 혁명 상황에 대처하기에 부적격이라는 점도 증명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당과 레닌은 그렇게도 큰 시각 차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트로츠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바로 이 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1917년 3월에 카메네프와 스탈린의 당 지도부는 거대한 역사적 임무에 한참 뒤쳐져 있었다.” (같은 책 제 1권)

그러나 백위군의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 이 논리가 제시되자 그는 이 논리를 재빨리 거부한다. 코르닐로프 쿠데타의 실패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빈버그가 한 말에 따르면 쿠데타 조직을 위한 자금을 쿠데타 주동자들이 가로 채서 저녁 파티에 탕진해 버렸다….상당량의 자금을 주동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지정된 장소에 도착한 어느 자금 제공자는 이들이 만취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자금을 전달할 수 없었다. 빈버그 자신의 생각에 의하면 이런 열 받는 ‘사고’만 아니었으면 거사는 확실히 성공하는 영광을 누렸을 것이다. 그런데 술에 만취하고 돈을 물 쓰듯이 쓰고 대의를 손쉽게 배신하는 자들이 주로 왜 이런 애국적 쿠데타 시도에 몰려들었을까? 역사적 임무라고 해서 언제나 이에 걸 맞는 주동자들을 동원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같은 책 제 2권)

모든 역사적 임무가 거기에 걸 맞는 주동자들을 항상 동원한다면 혁명이든 반혁명이든 모두 성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역사적 임무’에 못 미친 볼세비키당을 비난해서는 안될 것이다. 스탈린과 카메네프가 당의 수뇌부였다면 그것은 당원들이 그들을 선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임무의 실패에 대해 특정 인물을 비난해서는 안될 것이다. 비난은 당 전체에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닌이 있고 없는 것에 따라 당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면 당은 있으나 마나 한 셈이다.

혁명 과정에서 당과 대중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커진 데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대중이 혁명에 대해 너무 냉소적이어서 당의 지도력에 부응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1917년의 경우처럼 대중이 혁명에 너무 열성적인 반면 당이 냉소적인 경우이다. 후자의 경우는 대중이 아니라 당이 역사적 임무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고 당의 성격 자체가 대중과 당의 간극을 이렇게 크게 만들어 버렸다. 자칭 직업혁명가들로 구성된 소규모의 폐쇄된 조직은 진실의 담지자라는 확신은 크게 가졌지만 대중의 독자적 투쟁에 대해 적응할 능력이 없었다. 분자화 된 대중에게 투쟁과 집단적 결정의 구심 역할을 했던 노동자 평의회에 대한 당의 태도가 이 점을 웅변한다. 1905년에 대중이 자발적으로 수립한 노동자 평의회가 혁명의 중심이었으나 당 강령은 이를 주목하지 못했다. 혁명이 끝나고 시간이 지난 후에야 좌익의 일부 저술가들에 의해 노동자 평의회가 분석되었다. 1905년 혁명 과정에서 아나키스트 조직, 사회혁명당 극좌파, 러시아사민당의 소수 그룹 등은 노동자 평의회를 지지했다. 트로츠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톤 파네코크도 마찬가지였고 그가 주도한 노동자에 의한 생산수단 통제 운동은 레닌의 [좌파 공산주의: 소아병]에서 비난 당했다. 당시 볼세비키들은 전부 공개적으로 평의회에 적대적이었다. 뻬쩨르부르그의 볼세비키들은 다음과 같이 확신했다: “계급적 관점에 입각한 당 만이 노동자 정치 운동을 지도할 수 있으며 노동자의 의도를 순수하게 보존할 수 있다. 반면에 노동자 평의회는 완전 잡종이고 단호함이라고는 없는 집단에 불과하다.” ([러시아의 노동자 평의회 , 오스카 오바일러 저] 이 때 볼세비키당의 이름으로 멘델레예프는 이렇게 선언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정치 조직이므로 사민주의자들(볼세비키와 멘세비키)은 여기서 철수해야 한다. 이것의 존재 자체가 사민주의 운동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평의회는 노동조합으로 남던가 아예 사라지던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볼세비키당은 다음과 같은 전략을 택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첫째 노동자 평의회가 노동조합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도록 유도하고 둘째 이 시도가 실패할 경우 볼세비키당의 지도를 받도록 만들고 셋째 이 시도가 성공할 경우 가능한 선에서 빨리 해체시켜야 한다. 사민주의 조직과 노동자 평의회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공장에서 노동자 평의회가 그리고 모든 주요 도시에서 노동자 ‘의회’가 수립되는 시점에 그는 이런 주장을 내놓았다! 8월에 당 대회가 진행 중이었지만 러시아사민당은 노동자들을 초대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으며 노동자 전위당인 자신들의 명령을 무조건 이행하여 노동자 평의회가 불필요하다고 선언하기를 기대했다. 실제로 노동자 평의회는 이런 당 운동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이론이나 실제에서 당 지도자들의 지혜에 정면 도전했다. 이 상황을 자칭 직업 혁명가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07년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 제 5차 대회에서 레닌은 ‘노동자의 독자 조직과 노동운동 내의 아나키즘적 노동조합주의 경향들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당의 이해에 봉사하고 당의 이해가 보호되지 않는 한 당의 구분 없이 존재하는 노동자 평의회에 사민주의 조직이 참여하는 것을 승인할 수 없다.” (같은 책)

노동자들의 독자 조직에 대해 볼세비키들은 단 하나의 관점만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당의 조직력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당이 노동계급과 혁명의 유일한 보호자이므로 당과 무관하게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명백히 잘못되었거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주장을 트로츠키는 자신의 저서에서 되풀이하고 있다: 실제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당을 무시하면 당은 노동자들을 무시해야 한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볼세비키 당노선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면서 노동계급과 이들의 자기 해방 능력을 경멸하고 있다. 레닌은 이 팜플렛에서 자신이 존경하고 있던 카알 카우츠키의 주장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다: “이미 말했듯이 노동자들은 사민주의 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 의식은 외부에서 이들에게 주입될 수 있을 뿐이었다. 노동계급은 자체 능력으로는 노동조합 의식을 넘어설 수 없다.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고용주에 대항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부가 법을 통과시키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사고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나라의 역사가 이 점을 입증하고 있다…. 반면 사회주의 사상은 지배계급의 교육받은 구성원들 즉 지식인들이 다듬은 철학/역사/정치 이론들로부터 수립되었다. 현대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 지식인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러시아에서도 사민주의 사상은 노동계급의 자발적이고 독자적인 운동과는 거의 관계없이 등장했다….”

레닌은 자신의 주장을 이렇게 요약하여 결론지었다: “경제투쟁의 외부에서 즉 노사관계 밖에서만 노동자들은 계급적 정치의식을 획득할 수 있다.” 계급적 정치의식이 외부에서 노동자에게 주입되어야 한다는 이 주장은 현실에 의해 반박되었으며 사회주의 사상 목록에서 삭제되어야 한다. 1914년 이전까지의 프랑스 노동조합 운동은 레닌이 말한 바 ‘노동조합 의식’을 노동자들이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1906년에 채택된 아미앙(Amiens) 헌장이 명백한 증거이다: “노동조합 총연맹(CGT)은 어떤 정당에도 소속되지 않으며 임금노예제의 철폐와 고용주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계급의식적 노동자들의 조직이다.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 착취와 억압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할 것을 본 대회는 약속한다. 이에 본 대회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임무를 설정한다: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등 당면 개량투쟁을 촉구하면서 노동조합은 단기적으로 노동자의 운명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활동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노동조합은 또한 노동계급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길을 연다. 이 과업은 자본가들이 소유한 생산수단을 노동자들이 탈취하는 것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이 목적을 위해 노동조합은 총파업을 선언할 것이다. 이를 통해 임금 문제로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오늘의 노동자들이 내일에는 생산과 분배 활동을 장악하여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사적 문서는 사민주의의 영향력이 대단히 미약한 나라인 프랑스에서 노동계급이 ‘노동조합 의식’을 훨씬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와 반대로 프랑스에서 사민주의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자마자 노동조합은 경제투쟁을 중계하는 역할로 다시 돌아가 지금처럼 자본주의 유지에 필수적인 관료 기구로 전락했다. 노동계급이 혁명을 이룩할 능력이 ‘없으며’ 나중에 보겠지만 혁명 후에 생산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고 레닌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제 1 인터내셔널 창립 선언문의 사상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노동자들의 해방은 노동자들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소산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성격은 확실히 그 사상 속에 박혀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계급과는 이질적이다. 그리고 이 이질성에 대해 레닌은 자부심을 드러내지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더욱이 볼세비키 조직은 공업이 미약하게 존재하는 후진국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이 사실은 레닌주의 조직 이론의 후진성을 설명할지언정 합리화시킬 수는 없다. 이 유형의 조직과 사상은 1917년 이후 러시아의 후진성과 타국 노동자의 혁명성 결여를 이용하여 이것이 애초부터 가지고 있던 반혁명 씨앗을 결실로 맺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의식을 넘어설 수 없다는 레닌의 믿음은 노동계급의 머리를 잘라 거기에 볼세비키 머리를 이식시키는 시도일 뿐이다. 프랑스 노동조합이 초기에 설정한 목적과 노동자 평의회의 등장은 레닌의 생각이 틀렸음을 입증한다. 실제로 러시아에서 볼세비키들은 권력을 잡은 후 레닌과 트로츠키의 찬란한 지도 하에 정치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노동자 운동의 목을 베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목을 베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기에 몸체도 분쇄해야 했다. 이 과업은 세련미와 혁명 교육이 그만큼 덜 필요했기에 레닌과 트로츠키에 의해서 멋지게 수행된 이후 교양미라고는 전혀 없는 스탈린이 그 끝을 장식하게 된다.

그러나 트로츠키에게는 공정한 평가를 내려야 한다. 레닌이 1902년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발표하자 트로츠키는 이 팜플렛의 주장에 격렬히 반대했을 뿐 아니라 이 주장이 이후 초래할 최악의 위험성을 예상했다: 당이 노동계급을 대신할 것이고 중앙위원회가 당을 대신할 것이고 정치국이 중앙위원회를 대신할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서기장이 정치국을 대신할 것이다. 레닌주의 조직 이론에 대한 트로츠키의 이 비판이 이후 한자도 빠짐없이 온전히 출판되기를 희망하자. 왜냐하면 다른 어떤 저작들보다 그의 이 저작이야말로 현대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가장 확실하게 논박할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사민당의 좌파를 대표한 로자 룩셈부르크 역시 레닌의 당 조직 이론을 비판했다. 독일사민당의 개량주의 의회주의 우파에 대한 혐오감을 레닌과 공유했지만 그녀는 레닌의 중앙집중주의와 규율에 대한 그의 입장을 공격했다.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서 레닌은 ‘노동자에게 규율과 조직력을 습관화시키는’ 공장의 교육적 효과를 찬양했다. 이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이 말하는 규율은 공장 뿐 아니라 병영 그리고 온갖 종류의 관료들 즉 중앙집중화된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권력기관들에 의해 노동자에게 주입되고 있다….수천 개의 팔다리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인간 집단의 의식적 정치행위가 자발적으로 통합되어 움직이는 것을 뭉뚱그려 ‘규율’이라는 말로 규정하는 것은 언어 폭력이다. 전자의 정돈된 순응성과 인간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계급투쟁의 열망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러시아 사민당의 조직 형태])

사실을 말하면 자본가 계급의 조직 수준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레닌 자신의 의식이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전제적인 러시아제국을 뒤흔들고 1905년 혁명을 통해 절정에 이른 러시아의 혁명운동에 대해 1904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사회주의 대의는 엄청나게 전진했다. 그러나 사민주의 조직의 주도성과 의식적 지도력은 이 운동에서 미미한 역할 밖에 하지 못했다. 우리 조직은 이 거대한 사건에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혁명운동에 대한 사민주의 조직의 미미한 역할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다. 레닌이 주창하는 바 전능한 중앙기구의 부재는 더 그렇다. 이와 반대로 이런 거대 중앙기구는 혁명으로 열정적으로 나아가는 대중과 소극적 조심성으로 몸을 사리는 사민당의 태도 사이의 간극을 확연히 드러내면서 당 지역위원회의 혼란만 가중시켰을 가능성이 더 크다.” (같은 책)

그녀는 계속 이렇게 말했다: “레닌이 주창하는 초집중 조직은 긍정적이고 창조직인 정신보다는 밤에 순찰을 돌며 인민을 감시를 하는 경찰의 무미건조한 정신으로 가득 차있다.” 참으로 예언력이 뛰어난 발언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이렇게 말한 지 몇 개월도 되지 않아 노동자 평의회가 수립되었고 러시아사민당은 이 현상을 이해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볼세비키당이 그렇게 오랫동안 대비했던 사태가 1917년에 터졌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모든 것이 레닌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는데 이런 것을 두고 “소가 할 수 없는 것을 신이 할 수 있다”고 하는 격언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룩셈부르크는 이 모든 것을 정확히 예측했고 이에 따라 “당이 수행해야 할 당면한 거대한 역사적 임무를 방해하는 철조망을 철거하라”고 외쳤다. 그런데 이 철조망을 철거하기는커녕 볼세비키당은 결국 이 철조망으로 혁명 노동자 전체를 가두어 버렸다.

당시에나 지금이나 그녀의 지적은 똑같이 타당하다: “사민당 보다 훨씬 더 정당한 역사 발전의 주역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인민 대중의 진정한 의지를 처음으로 표현한 러시아 노동자 운동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 각하가 전능한 역사발전의 지휘자로 자임하며 나타나 러시아 혁명의 어깨 위에 올라타 그 지도부로 행세하려 한다. 이 능숙한 체조 선수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자아 만이 혁명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진실을 이해할 까닭이 없다. 오류를 저지르며 역사의 변증법을 스스로 배우는 주권은 오직 노동계급의 것이다. 딱 잘라 이렇게 말하자: 진정으로 혁명적인 노동자 운동의 오류들은 가장 훌륭하다는 중앙위원회의 무오류성보다 훨씬 더 풍성하고 소중하다.” (같은 책)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의 현 시점에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수십 개의 중앙위원회가 존재하면서 러시아 혁명의 법통을 들먹이고 있지만 이들은 한결 같이 당시 혁명의 교훈을 배울 능력이 없다. 지금 그녀의 주장은 1917년 당시와 똑같이 의미 있게 들린다.

이미 얘기한 바 대로 1917년 2월 볼세비키당의 노선과 역동성은 평의회로 조직된 대중의 그것과 충돌했다. 이 때문에 공장과 도시에서 권력 장악의 필요성을 이미 느낀 혁명 대중이 아니라 바로 볼세비키당을 설득시키기 위해 레닌은 정말 열심히 움직였다. 대중이 권력을 장악할 준비를 다 했으니 너희들도 서둘러야지! 너희들이 대중의 수준을 따라 잡아야지 그 반대가 아니지 않니! 결국 레닌은 ‘아나키스트’가 되어 현실의 사태를 거부하는 당을 이끌어야 했다. 이로 인해 대중의 열망과 볼세비키 당노선에서 벗어난 당이 같은 수준에서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 시점이 10월이다. 그리고 이 행복한 상태는 1918년 봄까지 지속되었다. 노동자의 지지가 필요했기에 볼세비키당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 몇 개월 동안 공장위원회는 우후죽순처럼 널리 수립되었다. 1917년 4월에 뻬쩨르부르그에서 공장위원회 협의회가 열려 이렇게 선언했다: “노동시간, 임금, 채용과 해고 등 공장의 운영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은 공장위원회가 결정해야 한다.” 6월에 열린 공장위원회 협의회는 ‘노동자에 의한 생산과 분배의 완전한 장악’ 그리고 ‘모든 집행기구에서의 노동자 절대 다수 구성’을 요구했다. 권력 장악이 성공한 직후 공장위원회 대회는 이렇게 선언했다: “노동자에 의한 생산 통제위원회는 생산의 감독에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지 말아야 한다. 노동자가 생산의 관리를 직접 수행할 준비를 해야 한다.”

[금속 노동자 소식]의 1918년 1월 호는 노동자 필리포프의 글을 실었는데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노동계급은 그 성격 상 생산과정의 중심 역할을 맡아야 한다. 앞으로 모든 상산은 노동계급의 정신과 의지를 표현해야 한다.” 이 진정으로 혁명적인 시기에 1918년 초에 열린 평의회 제 3차 대회에서 레닌은 “아나키즘 사상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연설했다. 그리고 판타크라바는 이렇게 말했다: “10월 혁명 직후 아나키즘 사상이 만연했다. 노동자에 의한 생산 통제 포고령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자본가들의 저항이 커지고 노동자에 의한 생산 관리에 이들이 계속 반대하는 것이 주요한 이유이다.” 곧 알게 되겠지만 노동자에 의한 생산 관리를 이 당시 반대한 것은 바로 볼세비키당 이었다. 이 상황이 일어나기 직전 아나키즘적 노동조합주의자였던 막시모프는 이렇게 말했다: “볼세비키당은 국가소멸 이론 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사상 전체를 포기했다. 이들은 일종의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1917년 말 아나키스트 볼린은 [노동의 소리]에 이렇게 글을 썼다: “국가 사회주의자인 볼세비키당은 일단 권력이 안정화될 경우 중앙집중적인 권위주의 지도부를 신봉하기 때문에 위에서 나라와 인민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할 것이다. 평의회는 중앙정부의 도구로 서서히 전락할 것이다. 철권 통치를 통해 모든 반대파를 압살할 억압적인 정치 국가 기구가 그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는 “모든 권력을 당 지도자들에게!’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1918년부터 이 과정은 실제로 진행되었다.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볼세비키당은 모든 반대 세력 특히 아나키즘 운동을 제압해야 했다. 이 정치 탄압은 공장에서 노동자에 대한 탄압과 함께 진행되었다. 선장 자크 사둘은 말했다: “아나키스트 조직은 모든 반대 세력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고 전투적이다. 이들에 대해 볼세비키당은 크게 우려하고 있다.” 볼린은 이 관찰을 확인시켜 준다: “아나키스트의 선전을 용인하는 것은 레닌에게는 자살행위였을 것이다. 폭력을 통해 모든 자유주의 사상의 표현을 방해 금지 억압하기 위해 볼세비키 당국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탄압은 노동자에 의한 생산 관리 문제에 대한 당의 태도 변화에서 시작되었다. 1918년부터 정부 시책에 대한 모든 반대는 볼세비키당 내부로 한정되었다. 당 외부에서는 모든 반대가 탄압되었다. 그래서 당내에서 일어난 사태들을 통해 탄압의 과정을 가장 잘 추적할 수 있다. 결국에 가서는 탄압당하는 노동자들을 방어하는 자들은 당내의 목소리도 침묵을 강요당했다. 1921년 3월에 열린 볼세비키당 제 10차 대회는 당내 모든 분파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당의 바깥에서는 크론슈타트 수병과 노동자들 그리고 러시아 내에서 아직도 존재하는 저항 세력에게 총과 대포를 동원하며 당은 바삐 돌아갔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마흐노 운동은 모든 대가를 지불하며 전멸시킬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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